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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한석봉) 최고의 명필가로 조선과 중국에 이름을 떨쳤다





서론


그는 조선 최고의 명필가로 알려져있다. 그것은 더 흔히 석봉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는 책이나 초서 등 다양한 서예(문자)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독특한 필치로 명나라에서 이름을 날렸다.





본론


한호는 1543년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서당에 가기가 힘들었다. 


글씨를 연습할 먹과 종이도 살 수 없어 글씨를 연습하기 위해 항아리나 돌에 물을 끼얹어야 했다. 


그러나 어려운 생활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한호를 부축하여 벼슬 공부를 시켰다. 


한호의 가난한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훌륭한 가르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호는 어려서 송악(개성)의 스승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의 어머니는 떡을 만들어 팔면서 아들의 공부를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한호는 혼자 있을 어머니가 걱정되어 몰래 집으로 돌아왔다. 


"왜 돌아왔느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한호는 "공부는 많이 했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불을 끄고 떡을 썰고 글씨를 쓰는 것과 비교해 보자고 했다. 





불을 켜자 어머니는 자른 떡의 크기와 두께를 모두 골랐고, 한호가 쓴 글자는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비뚤어졌다. 


어머니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은 한호는 돌아가 더 열심히 공부했다.




관직에 들어간 한호는 사자관(임금이의 외교문서를 받는 문서를 쓰는 관리)이 되어 나라의 주요 문서를 맡았다. 


사신을 따라 뛰어난 필치로도 이름을 날렸다. 




선조는 늘 벽에 한호의 글씨를 매달아주고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 때 조선을 도우러 온 유명한 장군 이여송도 한호에게 받아달라고 부탁했다.







결론


한호는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필적도 만들어 이름을 알렸다. 


추사 김정희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로 활동하다가 160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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