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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국립대학



서론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최고의 국가교육기관이다. 오늘날의 국립대학과 비슷하다. 유교의 경전, 역사, 문학 등 수준 높은 교육이 발달해 앞으로 관리될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본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시골에 학교를 짓고 운영하는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 등은 역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은 고려 충선왕 때인 1308년 국자감(國子監)으로 개칭되어 조선 시대 한양에 계속 건립되었다.


성균관은 크게 두 가지 일을 했다. 



첫째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 대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둘째는 명륜당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은 200여 명이었고, 첫 번째 과거시험인 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먼저 시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은 성균관 내 기숙사 동재와 서재에서 먹고 자고 엄격한 규칙에 따라 공부했다. 




그는 유교 경전, 중국과 한국의 역사책, 유명 학자들의 문학 서적을 공부했고 국가 정책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수업을 했다. 


정시모집뿐 아니라 우수한 시험성적이 필요한 전공과목 응시권이 주어지는 등 학생들 간의 경쟁이 치열했다.


성균관 유학자들도 자율협회를 운영했다. 




협의회는 국가 정책이 잘못됐는지, 집단 항소를 하거나 수업을 거부하거나 학교 진학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성경관 유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도록 땅과 농경지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왕이 제주도의 귤 같은 소중한 진리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경우도 있었다.


결론


유능한 경영 육성을 위한 최고의 교육기관 역할을 했던 성균관은 조선 후기에 국가의 지원이 떨어지고 과거 제도가 부당하게 운영되면서 덜 중요했다. 


재능 있는 사람들조차 성균관보다는 강력한 서원에 몰려들면서 옛날처럼 이름값을 즐기지 못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자 성균관은 명망이 높은 기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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